지역사회 네트워크 구축

요한의집은 여러분의 정다운 이웃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역안에서 정다운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곳에서 마트에 가고 빵집을 이용하고 미용실을 갑니다.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도와가며 살아가는 것..
반야월에 많은 분들이 환영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가까운 우리 이웃 이인상 베이커】

안녕하세요. 저는 동구 각산동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빵집할배예요. 몇해 전 손주가 태어나서 50대 후반에 할배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집과의 인연이 그러고 보니 꽤 오래되었네요. 2017년에 첫 오픈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한 입주민이 혼자 저희 가게로 들어와 빵을 고르다 빵을 먹고 그냥 뛰쳐나가는 날이 있었어요. 참 당황스런 일이었고 요한 입주민을 찾아 들어온 선생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후 이해할 수 있었지요. 간혹 요한 입주민의 등장에 아르바이트 친구들은 조금 겁에 질리기도 했습니다. 가게에서 드시고 계신 손님 분들도 계시고 해서 참 난해하기도 했고 이땐 입주민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속상하게만 생각했던 때였네요. 그렇게 선생님들도 입주민과 저희 지역 상인들과의 오해를 풀기위해 노력을 하셨고 단체로 저희 가게에 와서 음료와 빵을 먹기도 하면서 요한 입주민들을 자주 보다 보니 어느새 정(情)이 들었나봅니다. 이제는 요한 입주민이 들어와도 보통날과 같습니다. 간혹, 이름을 아는 요한 입주민이 들어오면 “00야 왔나~.” 그러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저도 그들에게 가진 안타깝게만 생각하던 제 선입견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도 사회로 나와 일반인들과 소통하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경험을 하고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선생님들과 함께 경험하는 모습들을 보니 ‘아! 나도 이들을 안타깝게 생각할게 아니라 같이 동네 빵집할배 혹은 아저씨같은 그냥 편안한 관계가 되어야겠다.’라는 다짐을 했지요. 그러다보니 요한에 빵을 배달 갈 때면 이젠 저를 보고 입주민 친구들이 반갑게 손 흔들며 아는척 해주기도, 저도 자주 보는 입주민 친구들에게 “밥뭇나!”하며 특유의 경상도 정(情)있는 안부인사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연이 되어 저와 같은 지역 상인과 제가 앞서 말했던 해프닝처럼 입주민들과의 오해가 있으면 중재 역할을 하며 오해의 끈을 풀기도 하고 입주민들과 함께 그리고 동구에 어울려가며 동구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참, 사람 정(情) 이란게 이렇게 얼키고 설켜 자연스럽게 물들어 가나봅니다.

【우리도 동네에 함께 살아가고 있어요】

그해 봄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의 전화기가 쉴새 없이 울렸다.
“여보세요..?” 
“예! 여기 세븐일레븐인데예~ 장애인 한명이 와 있는데 빨리 와서 데리고 가이소!”
“네.. 네.. 빨리 갈게요”
“여보세요..?”
“여기 대백마트인데요. 빨리 오세요. 과자 다 흩여놓고 지금.. 아.. 뭡니까 이게!”
“죄송합니다..”
아직도 나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마치 전쟁터에서 통신병들이 통화를 하는 것처럼 아주 분주하고 그 짧은 통화에서도 수없이 많은 상황들이 그려지고 여러 가지 감정들이 오가고 있었다.
내가 입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은 대구 동구 각산동이다. 처음 입사했던 2009년 당시 동구의 끝에 위치한 변두리 지역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큰 도로, 높은 빌딩, 대형마트 등이 들어서면서 번화가가 되었다. 나와 입주민이 살고 있던 동네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환경의 변화만큼이나 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인식 또한 많이 변화되었었다. 
입주민들의 욕구를 직원이 충족시켜주던 시대가 지나가고 그분들의 권리로 생각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입주민의 자유로운 외출, 그 첫 계단을 오르던 날이었다. 입주민들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동네 주민들은 갑자기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했던 입주민들을 만나면서 다들 불편해하거나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요한의집의 첫 계단은 그렇게 힘든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비난, 차별, 인격모독들이 매일 매일 우리를 지치게 했었다. 입주민들은 본인의 권리를 찾아서 동네로 나갔다. 하지만 권리의 이면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입주민들도 알아야한다고 생각을 했고 직원들도 함께 동참했다.
동네의 주민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입주민, 동네주민, 직원이 모두 노력을 해야했다. 입주민들은 우선 자주 가는 상점에서 먼저 인사를 나누고 물건을 계산하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마치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상점 안을 휘젓는 모습에 동네 주민들은 무서움, 그리고 화를 느낀다고 했었다. 입주민이 외출 할 때에 직원이 함께 동반하여 신호등을 보고 건너는 방법, 인사를 하는 것, 계산하는 것들을 알려주면서 동네 주민으로써의 권리와 책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동네 주민의 인식변화를 위해서도 노력을 해야 했다. 그 전에 인식개선의 첫 대상은 우리 직원이라는 당시의 상임이사 신부님의 말씀에 따라 직원들의 인식개선을 위해 캠페인, 설문조사, 부스운영 등을 함께 했었다. 
지역 상가에 자주 방문하여 인사도 드리고 고생하시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직원들은 시원한 음료를 전달하기도 했었고 항상 감사의 표현을 했었다. 그리고 입주민이 혼자 와서 도움이 필요할 때에 기관으로 연락을 주시거나 혹은 입주민과 동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렸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퇴근길 잠시 들린 빵집에서 “요즘에 OO씨가 잘 안보이네요?” 라고 먼저 안무를 물어오셨다. 근황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고 나오는 그 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실 동네에서 우리 입주민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저 장애인,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불리던 입주민이 이제는 본인의 이름으로 불린다는게 너무도 감동적이었다.
아직도 동네에 입주민이 혼자서 다니는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꽤나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도 작게나마 변화가 생겨났다.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는 것. 처음에는 조금만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신고하거나 기관에 곧장 전화해서 쓴소리를 하던 주민들이 이제는 입주민들과 소통을 하며 기다려주거나 잘못된 부분은 질책을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주민들과의 소통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빵집에 입주민이 일을 하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기관으로 빵을 배달하시던 사장님께 입주민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요청드렸고 매일 기관으로 빵을 배달하는 일을 흔쾌히 맡겨주셨다. 
아직은 입주민들이 동네 주민들과 관계속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멀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모여서 큰 변화를 이루어내리라 오늘도 다짐해본다.
나는 오늘도 우리 동네에 소통, 선도, 관심의 다리를 놓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